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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기록

“머라” — 그 말 하나로 설명되는 중년의 결혼 생활

by Old-Newbie 2026. 4. 30.

경상도 남자의 ‘머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잔소리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걱정과 애정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중년 이후,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머라’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입니다.


경상도에서 ‘머라’는 발음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먹어라’가 ‘머라’가 되고, ‘뭐라고 한다’가 ‘머라한다’가 되는 이 절묘한 수렴은, 어쩌면 언어가 스스로 삶을 닮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밥을 먹으라는 말과 잔소리를 듣는다는 말이 같은 소리로 들린다는 것. 이 단순한 우연 속에 중년 남자의 하루가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머라’는 ‘먹어라’

 

나는 오늘도 머라를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머라("일어났으면  물부터 머라")를 듣고, 양말을 뒤집어 빨래통에 넣었다고 또 머라를 듣고, 밥먹으며 핸드폰을 보고 있으니 다시 머라를 듣습니다. 대꾸를 하면 말대답한다고 머라를 듣고, 가만히 있으면 듣는 건지 모르겠다고 또 머라를 듣습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머라를 안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곧 결론에 도달합니다. 없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머라’는 ‘잔소리’

 

머라는 노력으로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잘해도 머라하고 못해도 머라합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 데 저는 결혼 후 20년이 걸렸습니다. 초반에는 어리석게도 ‘잘하면 되겠지’라고 믿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 대충 했다고 머라를 듣고, 청소를 하면 구석을 안 닦았다고 머라를 듣고, 장을 봐오면 영수증을 왜 안 가져왔냐고 머라를 듣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마트 영수증이 가정의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머라에도 나름의 체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즉각형 머라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하자마자 바로 날아옵니다. 반응 속도가 거의 반사신경 수준입니다. 문을 조금 세게 닫아도, 냉장고를 열어둔 채 멍하니 서 있어도 바로 머라가 도착합니다.
그다음은 예약형 머라입니다. 몇 주 전의 일이 오늘 소환됩니다. “저번에 그때 말인데—”로 시작하는 문장은 거의 예외 없이 머라로 끝납니다. 나는 이미 잊은 일을 상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력은 놀랍습니다.
그리고 주기형 머라도 있습니다. 명절 전날같은 이상하게도 특정 시점이 되면 자연스럽게 머라가 활성화됩니다. 이 패턴을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파악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형 머라가 있습니다. “오늘은 꼭 챙겨 머라!”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꼭 머라해야 먹나?”는 걱정인지 잔소리인지 경계가 모호합니다. 아마도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집 밖의 나와 집 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회사에서는 관리자로으로 30년을 보냈습니다. 부하직원이 열두 명이고, 회의실에서는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받아적습니다. 방향을 정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서 오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현관문 밖에 벗어두고 들어갑니다. 신발처럼. “이거 어때?  예쁘지?”라는 말 . 무조건 예쁘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문장입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집 밖의 나와 집 안의 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의 첫마디 "양파즙 샀다. 머라" 머라의 시작입니다. 나는 혼자  웃었습니다. 먹으라는 것도 머라이고, 뭐라고 하는 것도 머라입니다. 그 둘이 같은 소리라는 사실이 그날은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머라는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차고 넘치는 감동도, 드라마 같은 고백도 없지만, 밥이 있고 머라가 있고, 내일도 머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라가 사라진 집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허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내일도 머라를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이 집 안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Written & reviewed by Old-Newbie | AI-assisted with ChatGPT & Google Gemini | Images created with Canva & Google Gemini